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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은 서편인가 동편인가?

고창을 찾는 방문객들이 고창의 판소리를 둘러보고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고창이 “서편에 속하느냐, 동편에 속하느냐.”는 것인데, 대부분 딱 부러지는 대답을 원하는 이들에게 이 질문은 가장 답변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판소리의 창제(유파)는 동편· 서편의 2대분류, 동편· 서편· 중고의 3대분류 등이 있는데, 이중 동편-서편이 하나의 이항대립 쌍으로 판소리라는 거대한 신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며, 이 동편과 서편은 판소리가 고산준령을 형성하던 시기에 소리법제의 미학적 표준이 되었던 것이지 이것으로 다시 지역을 나누는 기준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동편과 서편은 판소리의 발전사에서 당대의 문화적 기호에 맞게 발전하여 미학적 표준이 된 역사적 산물이지 동시대의 평면적 대립물이 아니다. 동편제는 풍부한 성량으로 소리에 기교와 수식없이 통성으로 장단에 맞추어 사설을 붙여가는 소리이며, 장단도 <대마디대장단>으로 복잡한 기교를 부리지 않는, 즉 잔가락 없는 장단으로 소리를 운용하여 가는 것이 특징이며 그 만큼 고졸한 창제다. 이 동편제는 판소리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서편은 후천적인 수식과 기교에의 노력에 크게 의존하는 창제로, 가공과 수식과 기교로 소리를 만드는 유파라고 할 수 있다. 고졸하고 소박했던 동편제의 창법을 다듬어서 새로운 시대적 감정에 부응한 것이 곧 서편제의 창법인데, 기술적인 면에서 그만큼 향상한 것이며 정통창법으로부터 해방된 창법이라고 볼 수 있다.
판소리를 지역적인 자연· 인문환경과 연관지어보면, 발생학적으로 동/남부 산간지역이 우조를 주장하여 웅건청담하게 소리를 운용하는 동편소리와 관련이 있으며, 계면을 주장하여 만수화란(萬樹花爛)격으로 연미부화(軟美浮華)한 서편 소리는 서부평야지역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판소리에서 실제로, 우조와 계면조의 이러한 특징은 판소리의 하나의 거대한 신체(서편제든 동편제든)를 이루는 것이지, 우조=동편제, 계면조=서편제라는 등식은 통용되지 않는다. 보통 동편과 서편 등 판소리의 유파는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자연·인문환경과 문화적 배경

대체적으로 전라북도의 인문·자연환경은,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뻗쳐 있어 산간지역(무주·장수·진안·임실·순창일부)을 이루고 있고, 서북사면(전주·완주일부·이리·익산·옥구·군산·김제·정읍·부안·고창)에는 넓은 평야지역이 펼쳐져 있으며, 동남사면(임실일부·남원일부·순창일부)에도 평야지역이 펼쳐져 있다. 이중 고창은 전북의 서남단에 위치하여, 노령산맥이 서남향으로 줄기차게 뻗어내리다가 우뚝 멈춰 선 방장산이 갈재를 뒤로 하고 중첩 하여 방등산(742m)과 벽오봉(640m) 문수봉(620m) 고산(537m) 등 해발 500m이상의 준봉이 연장해 있어 자연히 동남부가 높고 서북부가 낮으며 남동부에 구릉지대를 형성하고 서북부에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고, 그 서쪽 바깥으로는 바다에 접하고 있다.
기후조건도 이러한 지리적 조건에 따라, 동북부 산간지역으로 갈수록 일조량이 적고 기온이 낮아지며, 서북·동남의 평야지역으로 내려올수록 일조량이 많고 기온이 높다. 이 자연 조건에 따라, 인문환경도 지역적인 특색을 달리하게 된다. 즉, 동북 산간지역에서는 논농사와 밭농사의 비율이 대체적으로 1:1의 비율을 이루면서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밭농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서북·동남사면의 평야지역에서는 밭농사보다는 논농사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와같은 자연환경을 잘 반영하고 있는 토속민요를 살펴보면, 동북부 산간지역에서는 ‘메나리토리/조’라고 하는 단일한 곡조에 가사를 실어서 부르는 교환창이 지배하며, 서부평야지역에서는 다양하게 분화 발달한 곡조에 선후창이 발달되어 있고, 동남부 산간지역에서는 이 두 문화의 중간지대로서 교환창과 선후창, 제창이 모두 나타나고 있다.

고창은 대표적인 서부평야지역으로서 벼농사가 발달되어 있으며, 보리·고구마·콩 등의 주곡농업, 그리고 수박·땅콩 등이 주를 이루며, 이 외에 무·배추 등의 소채류과 사과 등의 과수, 약초 및 잎담배도 재배된다. 고창 지역에서 불려지는 토속민요를 보면, 동북부 산간지역에서 불려지는 ‘메나리조’ 창법의 요소가 거의 완전히 사라지고, 육자배기조 창법이 더욱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다른 서부평야지역과 마찬가지로, 교환창 노동요는 찾아볼 수 없고, 모두 선후창 노동요로 불려지게 되는데, 발달된 벼농사를 중심으로한 노동의 분화에 따라 다양하게 음악적으로 분화 발달한 노동요들이 불려졌다. 이는 집단적인 두레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평야지역의 대표적인 특징들이며, 노동과 제의를 중심으로 일·놀이·제의가 문화적 계기마다 그 중심을 달리하면서 통일되어 나타난다. 노동이 중심이 되어 넓은 경작지를 효과적으로 경작하기 위해 조직되는 두레와 이 때의 두레굿의 중심에서 음악적 틀을 잡아주는 풍물굿도 서부평야지역의 대표적인 우도농악이다.

사실, 이러한 발달된, 고창을 포함한 서부평야지역의 음악문화는 판소리와 같은 고도로 발달된 예술을 낳게 된 근본적인 토대이며 바탕이다. 특히 고창은 전북에서 가장 서남단에 위치하면서도 “노령산맥의 줄기가 뻗어있어 동남부가 높고 서북부가 낮으며 남동부에 구릉지대를 형성하고 서북부에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는 형세”로 독특한 자연조건을 갖고 있으며, 이와같은 복합적인 지형적 특징은 동·서편을 모두 아우르는 판소리 문화를 설명해주는 듯 하다.

이와 같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지형적 특징 속에서, 대규모 집단적인 농업노동에 기반한 놀이문화보다는 중·소규모의 농업노동과 놀이문화가 고루 발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비교적 높은 생산력은 판소리 광대들이 오랫동안 머무르며 자신의 기량을 닦고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기화 선생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광대들이 평시에 부잣집에 한번 기식을 하면 몇 달씩은 걸리게 마련이다. 이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가 바닥날 때까지의 기간을 계산해 보는 데서 오는 수치이다. 이와같이 몇 달씩 기식할 수 있는 부잣집이 고창에 마치 서른 집은 되다 보니 이곳에서 몇 년씩은 거뜬히 머물 수 있게 되었고, 그 사이에 훌륭한 선배 광대를 만날 수 있어 새로운 레퍼토리를 갖출 수 있는 이점이 따르게 되었다.”

고창의 역사·문화적 배경

고창군은 마한 50여 국의 하나인 모로비리국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제 때는 모량부리현, 상칠현, 송미지현, 상로현의 네 고을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통일신라 때로부터 고려시대까지는 고을이 이름은 여러 차례 바뀌었으나, 대체로 고을의 구역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고 한다. 고창의 별명인 모양은 옛 이름인 모로, 모량에서 딴 것이다.

고창군의 고인돌은 고창땅이 위에서 언급한 자연·인문환경의 천혜 조건이 좋아 청동기문화가 꽃피웠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그 이후 고창의 역사적 문화형성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이기화선생이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고려 건국 이후 공신들에게 내려진 사패지지(賜牌之地)가 각별히 많아서 그 후손들이 대거 낙향하여 정착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사로(使路)를 등진 불사이군의 충절의식이 투철한 선비들의 은거지가 되어왔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전통은 판소리의 지역사에서 판소리의 발전과 부흥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문화적 요인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본래 판소리는 민중적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당시 부정부패한 관료를 풍자하고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아 이상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민중적 염원을 담고 있다. 즉, 판소리의 미래지향적 이념과 사로를 등진 ‘충절’의 이념형이 서로 부합했으며 같은 꼴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예술은 미흡한 현실에 대한 대상적 가치(代償的 價値)를 가지고 있다. 일찍이 고창에서 판소리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판소리 광대들의 예술세계에 대한 “절실한 이해와 이들 사이의 상호 유대, 그리고 내면의 욕구충족들이 조화를 이루게 되어 오랫동안 광대들을 보호해주는 대부역을 담당할 수 있었으며 또한 안식처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동리 신재효도 일찍이 그의 자서가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사나희로 조선에 생겨, 장상댁(將相宅)에 못생기고, 활 잘 쏘아 평통할까, 글 잘한다 과거할까...”
동리 신재효의 판소리 지원 활동은 이 노래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신분적 시대적 한계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일생일대의 사업이었다. 그는 중인층이라는 신분의 제약을 벗어나려고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양반 사대부적 교양을 넓히며 고창의 향반들과도 교유를 가졌으며 명목상의 신분상승(통정대부, 가선대부)을 이루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신분상승을 가로막는 현실적인 제약 앞에서 깊이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고, 현실 속에서 성취할 수 없었던 욕구를 판소리 지원활동을 통해서 실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고창의 역사·문화적 맥락은 19세기 후반 판소리의 향유층이 양반층으로 점차 확대되었던 판소리사의 역사적인 맥락과 맞아 떨어진다. 신재효는 중인신분의 중간자적인 위치에서 본격적인 양반층으로의 판소리 향유층의 확대와 유입의 시기에 판소리 이론의 정립, 예술적 규범을 세웠으며, 판소리의 부흥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