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하고 균형있는 판소리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판소리는 시나위무가음악권을 중심으로 발달한 거대한 문화적 실체로, 하나의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지역적인 부분을 따로 떼어놓았을 때는 독자적으로 그 의미를 갖기 힘들다. 말하자면 판소리는 한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서 다소 독자적으로 그 공동체내에서 향유되는 토속민요의 가창범위를 벗어나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장르로 거듭난 양식이어서 고창지역에 특유한 판소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역 판소리의 특징을 논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까지나 전체적인 의미망 즉, 보편적인 판소리의 개념 속에서도, 고창이라는 특수한 범주를 설정하고 이 보편과 특수의 범주를 거슬러 오르내리면서 그 의미를 따져볼 수 있다. 판소리라는 전체적인 의미의 표면에 떠오르는 지역의 특수성을 포착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지역의 구체적인 지역의 역할과 색채, 그리고 그 현장성 등을 고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창이 판소리사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동리 신재효라는 문제적 개인이 출현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고창이라는 지역성이 있었다. 우리는 앞에서 고창의 지역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충절의식’, ‘은둔’, ‘사패지지’, ‘사로를 등진 불사이군’ 등 다소 추상적인, 지역의 특성을 압축한 단어들을 살펴본 바 있다. 그리고 판소리의 미래지향적 이념과 사로를 등진 ‘충절’의 이념형이 서로 부합했으며 같은 꼴을 취하고 있었던 점도 언급하였다. 고창이 판소리의 또 하나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 시기, 19세기 후반은 판소리 향유층이 양반계층으로 확대되었던 시기였고, 고창은 이와 같은 시대적· 예술적 상황과 정확하게 부합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판소리의 공연은 중앙이나 관아의 나례희, 과거급제자의 행사였던 은영연, 홍패고사, 문희연 등의 큰 행사나 민간의 축제였던 고을굿, 마을굿 등의 저잣거리에서 양반가의 안방으로 확대 안착되어 있었다. 이와같은 개인적이고 좁은 실내의 밀폐된 공간은 높은 학식과 고도의 테크닉, 높은 수준의 음악성을 요구했으며, 판소리는 여기에 부응해나갔다.
이와같은 판소리 공연장소의 변화는 판소리가 보다 심화된 심미적인 거리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고창의 판소리 문화는 이 심미적인 거리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그 일례로 이 깊은 거리는 신재효의 판소리개작방향에서도 잘 드러난다.
판소리 연구자 중 강한영 박사 등은 이미 신재효 선생을 한국의 셰익스피어로 언급했던 바, 위대한 문화와 비교되는 신재효는 이미 민중성과는 일정정도 심미적인 ‘거리’를 두고 있었다. 신재효 사설이 그 실재적인 연행성보다는 문학성이 더 뛰어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민중적인 발랄성의 거세, 양반을 비꼬고 풍자하는 방자적 캐릭터의 약화와 양반을 비판하는 ‘정욱’과 같은 캐릭터의 등장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신재효는 민중성과도, 그리고 양반과도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사설은 양자에 거리를 두고, 아우르면서도 간결하고, 진중하며, 그러면서도 정대한 것이었다. 다음의 사설 개작은 그의 이러한 간결하고 진중한 면을 잘 보여준다.
춘향의 곧은 마음 아프단 말 하여서는 열녀가 아니라고 저렇게 독한 형벌 아프단 말 아니하고 제 심중의 먹은 마음 낱낱이 발명할 제, 십장가가 길어서는 집장하고 치는 매에 어느 틈의 할 수 있나 한귀로 몽구리되 안짝은 제 글자요 밧짝은 육담이라, 일쨋 낫 딱 부치니 일정지심 있사오니 이러하면 변할테요 매우 쳐라 예이 딱 이부아니 섬긴다고 이 거조난 당치 안소, 세쨋 낫 딱 부치니 삼강이 중하기로 삼가히 본받았소, 넷째 낫 딱 부치니 사지를 찟드래도 사또의 처분이요, 오쨋 낫 딱 부치니 오장을 갈라 주면 오죽히 좋소리까 육쨋낫 딱 부치니 칠사 중의 없는 공사 칠대로만 쳐 보시오 팔쨋 낫 딱 부치니 팔면부당 못될 일을 팔짝팔짝 뛰어보오, 구째 낫 딱 부치니 구중분유 관장되어 굳은 짓을 그 하오 십째 낫 딱 부치니 십벌지목 믿지마오 십은 아니 줄 터이요.
간결하면서도, 동리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이와 같은 사설 개작은 그의 판소리 개작의 방향, 나아가서는 고창 판소리의 특성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의 판소리 개작은 그의 입장에서 진중하고 정대한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남창 춘향가에서 판소리가 원래 지니고 있던 육담이나 욕설 등이 사라지고 한문 투의 표현으로 다량 바뀌고 있다는 점, 변강쇠가의 경우에는 유랑민의 삶을 비참하고 농도 짙게 묘사해서 평민의식을 잘 나타내고 있으면서도, 토별가는 아전으로서의 의식이 확대되어 있으며, 여섯마당 전체적으로 볼 때 아정과 비속이, 그리고 외설과 강조가 균형있게 섞여 있어서 긴장과 이완의 기본 구조를 언어 구사에서 드러내고 있다고 평가되는 것이다.
즉 그의 사설은 위에서 언급한 ‘심리적 거리’를 잘 설명해주는 것으로서, 동전의 양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의 합리성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인데, 신재효의 계급적 성격이 향리라는 중인층에 속한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재효가 추구하고,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을 통해서 드러나는 합리성이란, 유교적 합리성이다.
그러나 그의 합리적 사고는 액면 그대로 양반사대부의 의식이라기보다는 그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중간계층의 합리성인 것이다.
즉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전층은 양반 관료의 지배에 제어되어 사회적 상승을 억제받으면서도, 그 지배질서를 승인하고 유지하여야 자신의 안정과 이익을 얻을 수 있었던 계층이었던 만큼 계층적 자기모습 내지 갈등이 사고와 문화에서도 드러나는데, 그의 유교적인 합리성에는 질서의 감각과 가치의식에 투영되어 있으면서도 새로운 질서에로 나아가려는 감각과 가치의식이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판소리 이론과 교육의 고향
판소리라는 커다란 흐름에서 볼 때, 고창을 가장 두드러지게 특징짓는 지역의 독특한 역할과 색채가 있다면 그것은 고창이 판소리 이론과 교육의 고향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반성성(reflexivity)'을 가진 존재이므로, 어느 시대· 사회를 막론하고 그 사회 공동체가 살아 있는 한, 그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을 ‘비추어 보아’ 그 공동체의 제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반성의 기제’를 구축해 놓고 있거나 구축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그 반성의 기제는 일종의 메타-사회적인 집단적 반성의 ‘거울’ 형식을 취하게 되며, 그 사회나 개인들은 그 거울에 자기를 비추어 봄으로써 ‘자기반성’에 이르게 되고, 이를 통해서 그 개인과 개인이 속한 공동체 사회는 올바른 삶을 부단히 ‘재형성’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당시에 이미, 이서구, 박만순, 정현석 등 판소리에 대한 수준 높은 비평과 반성의 거울을 제시했던 식자/명창 등이 있었지만, 신재효만큼 지속적이고 치열하게 판소리의 이론과 비평,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길을 간 사람은 없었다. 신재효는 단지 이론을 펴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판소리를 예술의 반열에 등록시키는 자로서 그 예술적 지위를 부여하고, 광대가 갖추어야할 법례를 마련하는 한편, 지적인 소산으로 그 바탕인 사설을 개작하는 등, 구체적인 창악의 지도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의미심장한 지도를 함으로서 당대의 광대들과 그 향유자들에게 심대하게 영향을 미쳤다.
물론, 신재효는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판소리 창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판소리 전문교육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판소리 창자를 소리선생으로 초청해야 했을 것이다. 신재효에게 소리선생으로 초청되어 오랫동안 그의 판소리 전문교육을 도운 사람은 당시 동편제 소리의 명창이었던 김세종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남다른 판소리 지원과 판소리 이해가 판소리 창단에 알려지자, 당시의 명창들은 그에게 인정받기를 원하고 또 이론적인 지침을 받고자 하였다. 실제로 당대의 쟁쟁한 판소리 명창인 이날치, 박만순, 전해종, 김수영, 정창업, 김창록 등이 그의 지원과 이론적 지도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 판소리 창단의 최초의 여류명창인 진채선 등도 신재효 판소리 전문교육 실시에 따라 나타날 수 있었던 셈이다.
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에 신재효가 판소리 창단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날치, 김수영, 정창업 등이 서편제의 명창이고, 그 밖의 창자들이 동편제의 명창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판소리의 유파에 관계없이 판소리 창단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판소리 이론가로서의 신재효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글을 신재효가 지은 단가 「광대가」에서이다. 이 작품에서 신재효는 판소리의 4대법례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일종의 배우·연기론에 해당하며, 또 가객이라는 명칭, 시김새, 조, 장단론 등에 있어 비교적 초기의 이론을 피력하고 있어 판소리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4대법례를 제시하고 있는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 광대행세 어렵고 또어렵다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치레 둘째는 사설치레 그 직차 득음이요 그 직차 너름새라. 너름새라 하는 것이 귀성기고 맵시있고 경각의 천태만상 위선위귀 천변만화 좌상의 풍유호걸 구경하는 노소남녀 울게하고 웃게하는 이귀성 이맵시가 어찌아니 어려우며 득음이라 하는 것은 오음을 분별하고 육율을 변화하여 오장에서 나는 소리 농락하여 자아낼제 그도 또한 어렵구나 사설이라 하는 것은 정금미옥 좋은 말로 분명하고 완연하게 색색이 금상첨화 칠보단장 미부인이 병풍뒤에 나서는 듯 삼오야 발근달이 구름밖에 나오난 듯 새눈뜨고 웃게하기 대단이 어렵구나 인물은 천생이라 변통할 수 없거니와 원원한 이속판이 소리하는 법례로다 ...
이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신재효는 이 작품을 통하여 광대를 중심으로 판소리에 대한 이론을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판의 중심을 창자 중심으로 이해하고 광대행세의 어려움을 강조하면서, 광대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조건,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재효의 판소리 교육론은 창자와의 비판적 거리를 획득하고 있고, 개인적인 사승관계를 넘어서 객관적인 판소리 비평과 이론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다. 그 전에도 판소리 교육이 없었겠는가? 스승과 제자사이의 긴밀한 끈에 의해 이뤄지는 판소리 교육은 판소리 전승의 연속성을 획득하는 중요한 교육이다. 그러나 신재효는 이와같은 판소리교육의 차원을 국민적인 차원으로, 객관적인 차원으로 확대시켰다. 이것이 판소리 이론가로서의 진정한 힘이다. 그는 판소리 교육을 사승관계를 넘어 객관적인 수준으로, 전국민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서 당대의 미학적 표준에 판소리의 예술적 위상을 삽입하였으며, 판소리에 무한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는 당대의 명창들을 중국의 역대 시인들에 비유함으로서, 시의 이미지를 판소리 스타일과 결부시켜서 명창들의 음악행위를 시인들의 문학행위와 같은 등급으로 상승시켰던 것인데, 바로 이것이 그의 직관력과 천재적 예술관으로 당대의 미학적 표준에 우리의 예술혼을 당당하게 삽입하는, 그의 이론가이자 교육자로서의 위대한 면모가 아니겠는가!
판소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의 탐색과 지향
고창 판소리의 특징 중에 비상하게 자랑할만한 점중에 또 다른 하나는 고창의 판소리가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미래를 개척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고창의 신재효 선생은 최초의 여류명창을 탄생시켰으며, 판소리 분창을 시도함으로서 창극화의 단초를 제시함으로서 판소리의 발전방향을 미리 예시했던 것이다.
또한 광대가에서 제시한 4대 법례에서도 신재효 선생의 혜안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제시된 판소리광대가 갖춰야할 법례들은 엄밀히 말하면, 당대에 많은 평자들에 의해 논의 되었던 것이지 신재효 선생의 순수한 독창물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선생이 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판소리의 그 ‘판’에 제시하였던 점이다.
선생은 광대가에서 판의 중심을 창자 중심으로 이해하고 광대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조건으로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기본 문맥에서 볼 때, 판소리 공연은 공동체를 대표하는 위상을 갖는 광대에 의해 주도되고, 소리판 전체가 그러한 축 위에서 열리고 닫힌다는 점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신재효 선생이 이미 판소리를 연행하는 법도와 듣는 법도의 묘미를 얘기하면서도 판소리에 대한 ‘공연학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4대 법례를 인물치레를 가장 앞에 제시하고 있는 것에서 암시된다.
혹자는 이를 실패한 이론으로 규정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보면 판소리 광대들 중 상당수가 그 인물에 있어서 한쪽 눈이 없거나(이날치 1850-1910, 박기홍 1860-1920) 다리가 불편한 불구자이거나, 마마 자국이 심한 얼굴(장판개 1884-1937, 김채만 1865-1911) 등으로 그 ‘인물’에 있어서 결함이 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재효 선생이 말하는 ‘인물치레’에 대한 매우 편협한 해석으로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판소리에 대단한 안목을 가지고 있던 선생이 이러한 사례를 몰랐을 리가 만무하다. 더구나 용모는 번듯하나 소리수준이 낮고 발림만 그럴싸한 전문가를 “화초광대”라 불렀고, 사설은 그럴듯하고 아니리를 잘하지만, 소리 수준이 낮아서 재담으로 관중의 헤픈 웃음을 유도해 가는 광대를 “아니리광대”라고 칭하는 속을 선생이 몰랐겠는가?
신재효 선생이 말하는 ‘인물치레’는 단지 ‘용모’ ‘잘생긴 얼굴’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서 인물치레란 무대에 선 광대의 위엄과 풍모를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광대는 신과 인간을 매개했던 무(巫)의 후예로, 예술적 능력으로 천지를 유통시키는 사람이다. 그런데, 한낱 미모와 잘생김이 문제겠는가! 그리고 또한 여기에서 인물이란, 연극에서의 캐릭터(character)에 가깝다.
신재효 선생이 말하는 인물치레란, 광대가 무대에, 즉 마당의 중심에 서 그 자신으로 또는 다양한 인물로 현존하는 연기력을 말하는 것이다. 김익두 교수가 그의 저서 『판소리,그 지고의 신체전략』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판소리의 인물의 현전(現前;presence) 방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부분적 현전, 복합적 현전이다. 판소리 광대는 혼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위해서 다양한 인물로 현전하지 않을 수 없는데, 신재효 선생은 이것을 잘하는 것이 광대의 제1조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재효 선생은 시대를 앞서가는 혜안으로 판소리의 미래를 예견하고 실험하였으며, 준비했다. 여류명창을 길러낸 것이 그것이고, 분창을 시도한 것이 그것이며, 판소리를 공연학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점이 바로 그것이다.
고창의 판소리의 힘은 바로, 이와 같은 지적인 힘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