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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판소리의 명창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창은 후기 8명창 시대(헌종· 철종· 고종)를 전후에서부터 판소리 대명창들을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
가장 연대가 오래된 김수영(金壽永, 헌종· 철종· 고종, 흥덕 출생)을 필두로 김창록(金昌祿, 무장 출생), 김찬업(金贊業, 철종·고종, 흥덕출생), 진채선(陳彩仙, 철종·고종, 무장출생), 김토산(1871-1950 중반, 심원출생), 김성수(본명: 金二洙, 1930- , 심원에서 자람), 김여란(金如蘭, 1907- , 흥덕출생) 김소희(金素姬, 1917-1995), 흥덕출생) 등의 대명창을 배출했다.

이와 같은 명창 뿐 아니라, 판소리사에 큰 변동을 불러일으킨 판소리의 후원자이자 이론가· 지도자인 신재효 선생을 배출함으로서 고창의 특유한 판소리 문화를 특징짓고 있다. 신재효 선생의 출현은 판소리계의 지각변동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판소리의 발전방향을 가름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고창은 고창에서 난 명창들 뿐 아니라, 신재효 문하에서 활동했던 많은 명창들을 더하게 되어 풍부한 판소리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다. 신재효 문하의 명창들을 열거하면 박만순(朴萬順, 동편), 이날치(李捺致, 서편), 김세종(金世宗, 동편), 정창업(丁昌業, 서편) 등인데, 진채선을 필두로 여류명창의 맥을 잇고 있는 허금파(許錦波, 고종, 출신지불명, 해방 후까지 고창에 기거)를 포함하면, 고창이 판소리문화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문화적 자원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19세기 후반 고창출신 명창들 - 김수영· 김창록· 김찬업, 신재효 문하의 명창들 - 박만순· 이날치· 김세종· 정창업, 신재효 이후의 명창들 - 김토산· 김성수· 김여란· 김소희· 허금파 등으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19세기 후반 고창출신들 명창들

김수영(金壽永, 헌·철·고종, 흥덕 출생), 김창록(金昌祿, 무장 출생), 김찬업(金贊業, 흥덕출생)

[김수영(金壽永, 헌·철·고종, 흥덕 출생)]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김수영은 전라북도 흥덕면 출생으로, 헌·철·고 3대간 인물이다.
그는 신재효 문하에 있었던 박만순·이날치의 동배로서 꽤 명성이 높은 명창 이었다고 한다. 동서에 “서편의 요령을 잃지 아니하고”라는 대목으로 보아 서편 소리를 하였으며, “중모리는 특수하게 잘하였으며” 수궁가에서 ‘토끼 수궁가는 대목’이 그의 특장이었다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 알려진 고창출신 명창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명창으로 확인된다. 고창출신으로 그의 선배명창들이 있을 것이나, 현재 전하는 이가 없다고 하며, 그의 사승관계도 알려진 것이 없고, 그의 아들 김찬업에게 소리를 가르쳤을 것이지만, 이에 대한 사항도 전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
중요한 점은 그가 서편소리를 했다는 점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고창이 서편지역에 속해 있으며 서편 소리를 전해져 왔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에 관해 이보형은 ‘김수영을 비롯하여 다른 전라북도 서부출신 명창들이 서편제 소리를 한 명창들이 두루 많았고, 기타 여러 문화적 정황으로 봐서 전라북도 서부가 본디 서편제 전승지역이었던 것이 뒤에 동편제 소리를 배운 명창이 대거 출현하면서 동·서 소리가 복합하여 전승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고창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관례로 볼 때 김수영은 그의 아들 김찬업에게 어려서부터 서편소리를 가르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신재효 문하의 박만순과 김세종과 같은 국창에게도 소리를 배우도록 하여 국창으로 발돋움하게 했다는 점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이와 같은 전통으로 고창은 동편제 소리가 강한 문화를 이루었다고 평가된다.

[김창록(金昌祿, 철· 고종, 무장 출생)]
김수영이 흥덕에서 난 명창이라면, 김창록은 무장에서 난 명창이다. 뒤에 흥덕에 살았고 80여세까지 장수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조선시대 철종, 고종시대에 활동하였고, 동편제 소리로 박만순, 김세종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이름이 높았고, 심청가는 전무후무하게 독보적인 존재였다 하니, 대명창이 틀림없고, 춘향가에서 춘향 방 중 문방사우를 열거할 때 담배를 들게 되면 조선팔도 담배의 각기 특생을 열거하고, 그 특색에 따라 재미있게 엮어가는 ‘팔도 담배가’가 그의 더늠(특조)였다고 한다. 어찌나 재미있게 한바탕을 잘 엮어가던지 이것이 <춘향 방 팔도 담배쓸기> 널리 회자되었다고 한다.

50세 이후로는 그의 특장인 심청가를 부르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청중이 그의 소리를 듣고 감동한 나머지 통곡하여 울기를 그치지 않으니, 자기 역시 상심하는 때가 많아서였다 하니, 그의 소리의 진가를 알 수 있다.

특히나, 적벽가에서 발휘되었던 노학성(老鶴聲)은 그의 동편제 판소리 명창으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적벽가 한 대목 중 “달은 밝고 별은 드문데 강상의 경개가 장히 좋다...남쪽 하늘을 무릅쓰고 울고 오는 저 까마귀 이상스러이 울더니라, 가옥가옥 울고 오니 조조 듣고 괴이하여 글을지어 읊었으되”라는 대목에서 “가옥 가옥”하고 소리를 내어 지르면, 오작의 소리가 벽공에서 떠오는 듯 하였다고 하니, 소리로 만물의 자태를 표현하는 대명창으로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더늠은 그의 특장인 심청가 중에서 심청이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아 인당수 제수로 상고선인에게 끌려갈 때 부녀가 이별하는 대목이었다고 한다.

[김찬업(金贊業, 흥덕출생)]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김찬업은 전라북도 흥덕 사람으로 김수영의 대를 이은 아들이요, 오끗준의 생질이며, 박만순의 문도로서 그의 스승에게서 모든 법제를 전수받아 고종시대를 풍미한 명창으로 소개되고 있다. 아버지 김수영이 명창인 만큼 부친의 소리를 배웠을 것이지만 더 훌륭한 스승에게 소리를 배워 명창으로 발돋움하는 것이 명창의 소원이요 부자지간의 바램이었을 것인 즉, 신재효 문하의 박만순의 문도를 들어가 모든 법제를 전수한 것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대목이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는 김찬업이 김세종에게 배웠다는 기록은 없지만, 김찬업이 판소리 이론의 대가인 마찬가지로 신재효 문하에 있었던 김세종에게도 배웠다는 정황은 여러 곳에서 포착된다. 김창록이 김찬업을 ‘소리의 이면을 깊이 아는 것이나 제작의 고상한 것이 아울러 출중한 점이 많았다’고 평한 점이나 조선 창극사에 소개되어 있는 일화는 이를 뒷받침 해준다.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어느 때 정창업이 모처에서 춘향가 중 '문열고 사면을 둘러보니'라고 하는 대목에 이르러 우조로 훨씬 장완하게 불렀다. 또 흥보가 중에서 ‘도승이 내려오는데 장삼 소매는 바람에 펄렁 펄렁’이라고 하였다. 김찬업은 곁에서 다 들은 후에 창처의 실격된 것을 일일이 지적하여 말하기를 “‘문을 열고’를 그리 장완하게 할 필요가 없다. ‘문을 열고’는 좀 단하게 하고 ‘사면을 둘러보니’는 훨씬 우조로 장완하게 하여야 하고, ‘장삼 소매는 바람에 펄렁 펄렁’하는 데는 광풍이 대작하는 배도 아니오 미친 중이 동작하는 것도 아닌데 웬 소매가 그리 펄렁펄렁 할 리가 있겠느냐, 하면서 부드러운 춘풍에 도승의 ‘장삼 소매는 바람에 팔팔팔’하는 것이 적합하다”』

고 하였다고 한다.

이보형 선생에 의하면, 김찬업은 박만순 김세종과 같은 대명창들에게 판소리를 배워 국창의 반열에 오른 명창이며 김창록과 더불어 조선 후기 고창 출신 명창으로 쌍벽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한다. 그가 정응민에게 가르친 김세종제 춘향가는 현행 매우 우수한 춘향가 바디로 평가되고 있고 또 정응민을 통하여 정권진, 조상현, 성우향, 성창순에게 전승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것이니 한국의 판소리사에 큰 업적을 남긴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